승리는 가장 끈질긴 자의 것
롤랑가로스 2025 남자 단식 결승 <알카라스 vs. 시너> — 명승부의 조건
카를로스 알카라스와 야닉 시너의 롤랑가로스 2025 결승 하이라이트를 봤다. 2008년 나달과 페더러의 윔블던 파이널 경기처럼 오래오래 기억될 명승부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테니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과연 그랬다.
경기는 무려 5시간 29분 동안 진행됐는데, 두 선수 모두 엄청난 파워로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서로를 몰아붙였다. 후반부로 가면 기합 소리가 신음에 가깝다. 처절해서 좋았다.
- 승리는 가장 끈질긴 자의 것
프랑스 오픈이 열리는 필립 샤트리에 코트의 관중석 난간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승리는 가장 끈질긴 자의 것(La victoire appartient au plus opiniâtre)’. 많은 이들이 이번 경기가 슬로건에 더없이 어울리는 승부였다고 평한다. 알카라스는 초반 2세트를 내리 지고는, 자신의 코치마저 사실상 반포기한 경기에서 역전극을 썼다.

- 명승부의 조건
명경기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승부를 함께 펼칠 강력한, 최고의 맞수다. 시너 없인 알카라스의 역전극도 없다. 웹툰 <미생>의 최종화에서는 '최고의 바둑이란 나의 최선을 이끌어낸 상대의 몫'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사범님이 꿈꾸시는 최고의 바둑, 대국은 뭔가요? 절묘한 묘수가 가득한 바둑인가요? 결점이 없는 바둑인가요?
글쎄… 묘수가 가득한 바둑도 보는 재미가 있겠고
결점없이 둔 바둑도 기분은 좋겠지만
바둑은 혼자 두는 게 아니잖니?
묘수가 가득하려면 상대의 바둑이 너무 좋아야겠고
내가 묘수에 빠지지 않고 결점 없이 둔다는 건
상대 역시 결점이 없거나 적었다는 반증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상대가 최선을 다 한,
상대도 나도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 내가 이겼는데
나중에 복기를 했을 때
이보다 더 최선일 수는 없었던 바둑
결국 최고의 바둑이란
나의 최선을 이끌어 낸
상대의 몫일지도.
- 라이벌은 많을수록 좋다?
지난 5월, 나달의 은퇴식이 있었다. 나달은 은퇴식 연설에서 징글징글했을 법도 한 라이벌이, 한 사람도 아니고 셋이나 있어서 행운이었다며 페더러, 조코비치, 머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라이벌이 한 사람뿐이었으면, 그 라이벌이 퍼포먼스가 덜 나오거나 부상을 입을 때 분명 동기부여가 덜 됐을 것이라며.
"We were four of the best rivals. In some way when you're only two, you can lose a bit the motivation because the other starts losing or gets injured. Here, you never had to imagine, because always one of the four was winning the tournament. (...) We achieved our dreams. And probably because of that kind of rivalry we raised the numbers of the history of tennis to the next level."
https://www.reuters.com/sports/tennis/nadal-touched-by-presence-great-rivals-during-french-open-tribute-2025-05-25/
종목을 불문하고, 게임의 명수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라이벌에게 고마워해야 된다고. 왜? 내 실력을 키워주니까. 라이벌은 내가 최고의 기량을 펼치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준다.
- 문제를 반기는 사람
내가 하는 일은 스포츠에서의 라이벌 구도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라이벌 선수'를 '난관', 혹은 '문제'로 치환해보면? 같은 얘기일지도. 내 맞수의 기량이 높다면, 내 눈앞의 문제가 까다롭다면, 불평할 일이 아니다. 어차피 인생은 한 판의 게임이지 않은가? 그건 찬스다. 더 재밌는 게임으로 만들 찬스.
골치 아픈 일, 어이없는 일, 힘 빠지게 하는 일, 그리고 서러운 일. 그런 일들 앞에서 나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