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의 달인

시험날을 기다리는 마음에 대하여

학생 때는 시험날이 좋았다. 출제 범위는 명확했고, 연습문제를 풀다보면 ‘이 정도면 됐다’는 감각이 생기곤 했기 때문에 막상 당일엔 신이 나기도 했다.

슬프게도 일을 시작하고는 깨끗한 확신을 가졌던 적이 없다. 범위는 무한하고, 준비는 늘 부족해 보인다.

희망에 부풀어 시작한 새로운 프로젝트는, 정작 출발하면 금세 막막해진다. 초반의 낙관은 사라지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수 천가지, 혹은 수 만 가지의 조합에서 딱 맞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밤잠을 설치게 만든다.

이번도 다르지 않았다. 고통의 계곡을 또 한 번 지나야 했다. 시작할 땐 분명 즐겁게, 재밌게 해보기로 다짐했는데, 똑같이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조용히 지나간 날이 없었다. 몇 달이 어떻게 지나간건지 모르겠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죽상을 하고 고뇌에 차 일하기로 유명하다. "때려치울까?"라며 팀원들에게 대놓고 투덜댄다. 어쩐지 넉넉한 마음일 것 같은 봉준호 감독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영화를 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을 묻는 질문에 그는 "아씨 기억이 안 나네.."라고 답한 바 있다. 동시대 최고의 거장들도 이럴진대, 내가 혼돈을 겪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 걸까?

하지만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개봉 후 더이상 영화를 고칠 수 없는 영화감독도, 책을 출판해내면 더이상 퇴고할 수 없는 작가도 아니다. 첫 시도가 들어맞지 않는다면, 수정해서 될 때 까지 몇 번이고 다시 낼 수 있다.

나는 수험생도 아니다. 1번부터 50번까지 각 문항의 정답을 빠짐없이 맞춰야 하는 시험을 치르는 응시자가 아니다. 틀린 답이 있었으면 고쳐서 다시 내고, 백지로 냈던 답은 그후에 답을 찾아 다시 제출하면 된다.

학교를 졸업한지 긴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나의 어떤 부분엔 입시형 인간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 같다. 어떤 문제가 나올지, 그 문제의 답은 무엇일지 시험을 치르기 전에 전부 알아두어야 한다는 착각을 아직도 한다. 그 착각을 버려야 하는데. 실행의 속도가 답답해 질 때면, 또 학생 마인드는 아닌가 점검하게 된다.

정주영 회장도 말하지 않았나. 모든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면 인간은 약해진다고. 단박에 모든 정답을 꿰어내는 건 멋있어보일지 몰라도 지금 내가 되어야 하는 모습이 아니다. 내가 되어야 하는 건 수정의 달인. 그리고 반복(iteration)의 달인. 지금 필요한 건 정답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결국 잘 다룰 수 있을 거라 믿는 담담함이다.

생각을 고쳐먹으면, 어른이 되어 맞이하는 모든 마감일도 다시 신이 날 수 있다. 무한한 출제범위에 압도되는 대신, 몇 번이고 다시 풀 수 있는 무한한 자유에 집중할 수 있다면. 지금 눈앞의 이 시험도 즐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