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천직의 조건

장강명, <먼저 온 미래> — AI로 인한 바둑계의 변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해

'얼마나 AI 같은가?'

나라는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지표가 이것이라면, 과연 나는 웃을 수 있을까? 놀랍게도 바둑계의 프로기사들은 이미 매일같이 이 질문을 받고 있었다.

2016년 이세돌-알파고 대국 이후, 바둑판 위의 기준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기사의 강함은 우승 횟수가 아니라 ‘AI 일치율’로 가늠된다. 즉 인공지능이 추천한 수와 얼마나 일치하느냐가 곧 실력이 된 것. 인공지능처럼 잘 둬서 별명이 ‘신공지능’이라는 신진서 9단조차 AI 일치율은 40% 후반대에 그친다. 인간이 AI를 이기는 건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장강명의 책 <먼저 온 미래>는 이런 대격변을 마주한 바둑계를 다룬다. AI가 인간을 앞지르기 시작한 이 시대에 우리는 직업과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대격변을 마주하는 방법들

작가는 이런 대격변을 마주한 바둑 기사들의 각기 다른 대응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바둑계를 떠난 이(이세돌)도 있고, 담담하게 AI 앞에서 매일 10시간을 훈련하며 정진하는 이(신진서)도 있고, 아예 AI를 적극 활용하며 반전극을 쓴 이(이호승 3단)도 있다.

그리고 여전히 바둑을 하지만, 목표를 수정한 이도 있다. 커제가 대표적이다. 커제는 여전히 정상급이지만, 탁월함을 한 끗 더 높이기보다는, 스타성을 키우는 것에 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커제는 이단아죠. 1등을 포기한다는 게 쉽지 않은 얘기거든요. 이 친구가 1등을 유지하는 걸 포기하고 뭘 하느냐. 상금 최대화가 아니라 자기가 버는 돈의 최대화를 추구하고 있어요. (...) 바둑 공부를 줄이고 방송에 출연하고, SNS 활동으로 인플루언서가 되고, 식당도 열어요. 기존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죠. 저는 이 친구가 시대를 앞서간다고 생각해요. 커제가 신호탄을 올린 거예요." (p.261)

새로운 가치의 부상: 탁월함 대신 인간다움

흥미롭게도 바둑 팬들의 취향도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최강자의 완벽한 대국보다 30위권이라도 전투적인 성향을 보이는 기사들이 펼치는 대국을 더 선호하기 시작했다. 수비형 바둑보다는 주로 공격형 바둑을, 특히 여성 프로기사들과 시니어 프로기사들의 대국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시니어 기사들은 실수가 잦아요. 정상급 기사들에 비하면 수준도 떨어지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실수하는 모습을 좋아하거든요. 완벽하게 두는 바둑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바둑을 좋아하는 거죠." (p. 248)

승부 자체보다, 승부 속에서 펼쳐지는 기사들의 개성과 '스토리'가 대국을 보는 재미의 중심이 된 것이다.

새로운 천직의 조건: 쓸모 없음

바둑계가 보여준 이런 변화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AI가 내가 하는 일을 나보다 더 잘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인간인 나는 '당연히' 그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걸까?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더 인간다운' 영역을 찾아 피난가듯 옮겨가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손쉬운 결론을 내기엔, 책 속에 인용된 이희성 9단의 답변이 눈에 밟힌다.

"(...)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니까 바둑이 진짜 재미있어졌어요. (...) 바둑 공부를 다시 한 느낌이고, 바둑을 다시 알게 된 느낌이에요. 바둑 속에 숨은 내용이 이렇게 무수히 많았구나 하고요. 저는 바둑을 둔 지 30년이 넘어가는데 처음 20년보다 최근 8년이 더 재미있어요. 너무 즐거워요. 신기하고요." - 이희성 9단 (p.93)

그의 증언은 우리에게 다른 가능성을 시사한다.

바꾸어 질문하기

우리는 AI에게 대체되지 않는 직업이 무엇일지 묻는다. 하지만 이 질문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AI가 잘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 AI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더 잘 해내고 싶은 일. 그런 일이 무엇일지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쓸모 없는 직업', '쓸모 없는 일'.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쓸모 없음'이야말로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직업의 핵심 속성일 수 있다.

작가의 주장대로 바둑계가 마주한 격변이 앞으로 전 영역에서 일어날 변화의 예고편이라면, 바로 지금이 우리가 자신의 일과 존재 이유를 탐구할 때다.